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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W. 룩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 번이고 이곳에 되돌아온다.

 

하데스는 매일 나무 위에서 길고 늘어지는 낮잠을 잤다. 이미 미쳤거나 미치는 중인 정신머리에는 수면보다 좋은 게 없었다. 라케티카 대삼림의 울창한 숲속에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아모로트의 평안함이 떠올랐다. 비선형적인 일상을 원하는 이유로는 부족했지만, 특정한 장소를 고집하는 이유로썬 충분하다. 슬슬 일어나 볼까―하는 생각이 들던 것도 잠시. 저 멀리 군사인 듯한 발걸음이 땅을 메웠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얼굴로 응시하던 하데스가 느릿느릿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감상을 부숴 먹는 건 변하질 않는군.”

 

불평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등을 돌리는 찰나 들릴 리 없는 이름이 공기 중으로 전해졌다.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찾아라.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에메트셀크. 14 인 위원회의 명예로운 직책인……. 커르다스 공기보다 서늘한 한기가 하데스의 주위에 들러붙었다. 어느 놈이 불렀건 곧 하이델린의 곁으로 보내 주마. 중얼거리며 탁한 영혼의 색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컷.

 

 “괜찮은데?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어요.”

 “다음 대사가 you think I`d let someone stare me down이죠. 발음 주의하시고.”

 

유리 조각 같은 조명이 금세 하데스의 몸을 감쌌다. 배역과 저를 혼연일체 하는 세기의 명배우, 하데스. 그의 주위에는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스태프들이 분주히 이동 중이었다. 이번에 맡을 배역은 에메트셀크예요. 저명한 감독의 작품이지만, 하데스의 연기야 말할 필요 없이 유명하니까. 평소대로만 하고 기죽지 마세요. 당연하고말고. 속으로 대답하며 어린 매니저의 목소리를 상기시켰다. 의자부터 찾아볼까. 게슴츠레한 눈으로 걸터앉을 아무 의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니, 상기된 얼굴의 스태프가 “피곤하죠? 하데스 씨.” 따위의 말로 튼튼한 의자를 내어 주었다. 쉽다니까. 몇 사람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자신에게 실리가 생기면 제일 먼저 도망갈 치들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가 띠고 있는 미소가 경멸의 의미인 걸 들키는지, 들키지 않는지에 대한 경합은 오래전부터 해 왔던 것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매니저가 없네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앳된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기껏해야 열일곱 살. 연예계에서 단정은 금물이었으므로 굳이 언사를 높이진 않았다. “어른은 어디 계시지?” 언사만 높이지 않았다. 분수를 모르는 꼬맹이는 어느 상황에서든 질색이다.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트장을 가리켰다. 감독의 아들일 수도 있겠군. 손을 내젓는 대신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가 탐나는 모양인데, 일하는 사람들 방해하진 마라.”

 “왜 혼자 계세요?”

 “…….”

 “오늘 뭔가 이상하죠?”

 

제일 이상한 건 네 등장일 텐데. 침묵을 곧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소년이 재잘재잘 입을 열었다. 하데스는 에메트셀크고, 에메트셀크는 하데스예요. 어느 누가 우위를 점할 순 없어요. 뭐라는 거야. 속내를 감출 마음도 없던 하데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매니저가 아프다고 나오지 못한 것부터, 망할 꼬맹이의 등장까지. 광신도거나 광신도가 돼 가는 중인 이 꼬맹이부터 처리해야 삶이 순탄해질 터다. 고요한 세트장을 둘러보다 위화감에 몸이 흠칫 떨렸다.

 

세트장이, 고요하다고.

 

어느새 주위가 온통 숲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으며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요새 피곤했으니까― 기이한 꿈을 꾸는 거겠지. 평생 동요해 본 적 없던 하데스의 심장이 미약하게 두근거렸다.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싶어요?”

 “……….”

 “동포들의 진의를 외면하고, 자신의 차고 넘치는 욕망과 울분을 해소하기만 하는….”

 “닥쳐.”

 

 

 

 “네?”

 

정갈히 감긴 눈 위에 섀도우를 바르던 스태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나, 나도 모르게 하데스 씨의 심기를 거슬렀나 봐요.” 하며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언뜻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다. 지독한 꿈을 꿨다고 해명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으니 눈두덩이에 떨리는 손길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실수하지 않고도 긴장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망할 꼬맹이의 말대로 오늘은 뭔가 이상한 날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철학적인 감정이 몸을 지배했다.

 

 

 

 “그거 페르소나네.”

 

명쾌한 답을 뱉은 휘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로서의 페르소나는 누구나 있는 거야. 도리어 나는 네가 로봇이 아닌 거에 감격스러운데. 만족스럽지 않은 답과 우는 시늉을 같이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다. “난 모든 작품을 일관되게 연기해 왔어. 지금 와서 페르소나니 어쩌니 해도 안 와닿는다고.” 유일한 친구인 네 해답이라도 말이야.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진 하데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휘틀로마저 저런 말을 한다면 누구에게 가야 하지. “온 김에 와인 마시고 기분이나 풀어, 하데스.” 무기력한 태도가 익숙한듯 휘틀로는 몸을 일으켰다. 넓은 거실에 와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린다.

 

 “페르소나가 아니라면, 짐작 가는 부분은 있고?”

 “꼬맹이가 한 명 있었는데.”

 “꼬맹이?”

 “열일곱쯤 돼 보이는. 세트장에 겁도 없이 돌아다니더라고.”

 

그 꼬맹이를 만난 후에 이상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지. 회상하던 하데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니겠지, 친구? 휘틀로는 부정 대신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주었다. “글쎄. 네가 적당히 일하는 법을 모르는 건 사실이지, 친구.” 가시 있는 말과 함께 흐를 것 같은 잔이 하데스의 앞에 대령 되었다. “마시라고 주는 거야, 조롱하려고 주는 거야?” 투덜거리면서 한 모금을 삼킨 하데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한 날이야. 그 이후로 어떻게 촬영했는지 기억이 안 나….”

 

다음 대사인  “you think I`d let someone stare me down”은 연습조차 한 적 없다. 같은 요지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니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어차피 내일 스케줄도 없고 한숨 자는 건 어때. 휘틀로의 나긋한 목소리와 특유의 향이 하데스의 정신을 덮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어. 목을 조이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허벅지를 압박하는 바지의 버클마저 풀었다. 제일 편안하게 자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잘 자. 하데스의 말을 끝으로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you think I`d let someone stare me down….”

 “페르세포네.”

 “휘틀로, 하데스가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의 삶을 노려보고 있다는걸.”

 “이제 수습하기 힘들어. 멋대로 나타나지 마.”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소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각하고, 깨닫다가 에오르제아로 정신이 향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는……. 듣기 싫다는 듯이 페르세포네가 말을 잘랐다. “그럴 일은 없어. 내가 있던 곳으로 불렀을 때부터 다짐했던 거니까.” 하데스의 숨소리 앞에 휘틀로와 페르세포네가 마주앉았다. 

 

너는 네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 번이고 이곳에 되돌아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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