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마도사의 기록
W. 레오다느
우리들의 세계가 무너지던 날. 나는 그곳에 있었다.
지성을 가진 모든이들의 선망과 동경을 담아 이룩한 도시였다. 영원에 가까울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도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선망어린 탄식과 동경어린 한숨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도시였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어느 누구 하나를 적대시 하거나 질투하지 않았고 누군가와 뜻이 맞지 않아 서로가 다른 이념을 품더라도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노력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던 사람들이였다.
지식이 높은 자는 자만하지 않고 부족한 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들은 서로가 가진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있는 그 누구도 나이가 많은 자와 적은자로 차별하지 않았고 약하고 어린것에게도 다정하게 웃으며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춰주는 이가 가득한 도시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배우고 서로의 이념에 대해 토론하며 모든 이들의 새로운 이데아를 나누며 살았다.
그 모든 것을 부숴버린 재앙이 찾아오기 전 까지는.
별의 이치가 흐트러지고 섭리는 무너졌다. 인간의 공포가 만들어낸 야수들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들어있던 또 다른 공포를 불러 더 큰 재앙을 만들었다. 아름다웠던 도시가 무너진 그 순간에도 내가 사랑하던 도시의 소중한 동포들은 기꺼이 제 목숨을 토대삼아 새로운 별의 이치를 만들고 섭리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린 별은 살아갈 의지를 잃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슬퍼하던 이들은 또 다시 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죽어가던 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메말라버린 강에는 새로운 물줄기가 흐르고 야수들의 발에 짓밟히고 불타버려 갈라진 대지에는 녹빛의 생명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별이 다시금 생명을 되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것들을 위해 희생했던 우리의 동포들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재앙을 피해 흩어졌던 동포들이 14인의 위원회의 아래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나는. 적어도 별을 위해 희생했던 동포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어차피 생명이 살 수 없는 이 별을 다시 세운것은 우리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던 재앙을 막아낸 것도 우리였다. 우리의 그늘 아래에서 새로이 태어날 생명의 일부를 토대 삼아 그들을 위해 희생한 동포들을 불러오는것이 무엇이 문제란말인가. 그러나 살아남은 동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생명에게.
우리가 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살아남은 우리들의 동포들과 이 별에 새롭게 살아갈 생명들을 위해 희생한 동포들의 뜻을 반하면 안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툼이 일어났다. 언제나 차분하게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은 처음으로 겪어본 멸망의 공포와 재앙의 악몽 속에서 예전의 여유를 잃었고 서로를 존중하던 시간을 잊었다. 그것은 끔찍했던 재앙의 재림이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는 공포가, 두려움이 발밑의 그림자처럼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무리로 갈라진 동포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다. 찬란했던 과거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재앙의 부스러기가 우리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만약 우리들에게 조금의 여유와 존중이 남아있었다면. 마지막 재앙은 우리를 피해갔을것이다.
두개로 갈라진 사상과 이념은 서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흐트러진 별의 이치를 바로잡고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조디아크를 봉인하기 위해 갈라진 또 다른 동포들은 그들의 마지막 이념을 양분삼아 하이델린을 만들어냈다. 갈라진 우리들의 이념처럼 조디아크와 하이델린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던 마지막 재앙이 찾아오던 날. 우리들의. 나의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세계는 부서진 거울처럼 추악하게 조각나버렸다.
유리조각처럼 부서진 세계에서 간신히 재앙을 피한 것은 겨우 셋이 전부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세계는 얼핏 보기에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조각난 그곳은 또 다른 재앙이며 지옥이였다. 선명하고 반짝이던 모든 것들의 영혼은 조각나 그 빛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나의 동포들 역시 더 이상의 빛을 잃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고민했다. 소중했던 것을 잃어버려 더 이상의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허무하고 공허한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흘러나왔다. 절망과 슬픔과 허무에 빠져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조각난 세계는 다시금 생명을 얻어 앞으로 나아갔다. 남아있는 모든 것이 망가진 세계에도. 아주 조금의 희망은 있지 않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세계는 조각난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토대는 우리들의 동포가 만들어낸 세계였다. 실낱같은 희망이 살아남은 이들의 발목에 족쇄처럼 채워졌다.
움직여야했다. 절망에 사로잡혀 굳어버린 발을 움직이고 칼을 차고 묶여버린 손을 움직여 세계를 돌려야했다. 라하브레아와 엘리디부스. 그리고 나. 에메트셀크는 서로의 책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과거와 재앙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서 조각난 세계를 되돌리자 뜻을 모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또 다른 이에게 몸을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었으며 자신의 등에 얹어진 작은 짐이 되었다.
성급했던 우리들의 행동은 첫번째 실패를 불러왔다.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꿈틀거리는 세계를 만들어낸 우리는 잠시 절망했으나 다시 그것에서 배움을 얻었다. 성급하게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닳은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한번 세계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두번째 시도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공했다. 원초 세계에서 첫번째 재앙이 시작되었다. 자잘하게 조각난 영혼들이 아주 조금이지만 예전의 빛을 되찾았다.
조그마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디딘 발걸음 위로 작은 새싹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중하고 여린 희망을 위해 나 자신을 조금씩 깎아 작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새로운 별 위로 자리잡은 인간들. 아니 완전한 인간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들어진 것들은 너무나 어리석었고 오만했으며 이기적이였다. 고작 백년도 살지 못하는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고 짓누르는 것에 일말의 죄악감도 가지지 않았다. 엘리디부스는 그것들을 방관하며 세계의 조율을 관장했고 라하브레아는 그 되다만 것들을 이용해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으며 에메트셀크는 커다란 무대 위로 그것들을 올려 연극을 만들었다.
일곱개의 연극이 일곱번의 무대 위에 올랐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여러개의 이야기가 모여 커다란 틀을 만들었다. 아주 가끔은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생명에게 맡기자 주장했던 동포들의 말이 생각이나 에메트셀크는 한참은 부족하고 모자란 그것들에 섞여 삶을 살아보기도 했다.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그것들도 예전에 인간들처럼 사랑하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불완전한 것들로는 생각 할 수 없을만큼의 시간을 살아온 에메트셀크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시간동안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 사람의 삶을 살아보기도 했고 모든 것을 해탈한 성직자의 삶을 살아보기도 했으며 때로는 충직한 신하의 모습을 할때도 있었고 아주 가끔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자식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역활을 맡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자라났다. 끝없는 시기와 질투. 배신과 음모. 몇번이나 기대하고 희망했지만 그것들의 마지막은 예정된 것 같은 실망이였다.
거듭된 실망에 지쳐버린 에메트셀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만약 멸망의 끝에 내몰린 제 1 세계에서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예정대로 그것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리운 이의 모습이였다. 이제 한발자국. 멸망의 끝에 서있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며 뛰어다니던 이의 모습은 에메트셀크의 흥미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모습이였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어쩌면 조각난 나머지 세계를 통합시키지 않고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그래서 그는 새로운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신이 품은 가능성에 대해 아주 조금의 의심을 품었던 에메트셀크는 최소한의 시험을 준비했다. 만약 이 세계의 멸망의 빛을 모두 다 끌어안고 버틸 수 있다면. 자신도 더 이상 실망하지 않고 그것에게 기대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시험은 실패로 끝났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심해로 가라앉은 템페스트의 깊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도시의 모습을 본따 만든 환영 속에 자리잡은 에메트셀크는 탄식했다. 가련하고 불쌍한 영웅님. 끝내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불완전한 에테르. 그리운 동포들의 모습이 그를 스쳐지나간다.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에 그의 굽혀진 어깨는 더욱 무겁게 짓눌렸다.
"내가 초대한 건 세계를 멸망시킬 괴물로 변한 너야."
이제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빛의 에테르가 '영웅'의 불완전한 영혼을 찢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금이 간 컵에 가득 담긴 물이 흘러넘치기 직전의 상황처럼 아주 조금의 충격을 받으면 저것의 영혼은 조각조각 찢겨나갈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등 뒤에 선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아주 오래전 바람마저 멈춰버린 별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던 동포들의 뒷모습과도 닮아 있어서 알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자신들이 이 세계의 정의이며 이 세계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외치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것들. 자신들이 다른 것을 짓밟는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는 것들이 자신들이 그 상황이 되었을때 불합리 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아닌 고대인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오만하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들!
" 나를 봐-!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너희 사이에 섞여 살아왔어! 함께 밥을 먹고, 싸우고, 아프고, 늙기도 했다. 곁에서 죽음을 지켜보고 때로는 아이를 가진적도 있다. 그렇게 수 없이 재어 보고, 그때마다 수없이 판단했다. 무력하고 나약한 너희들이. 이 세계를, 이 별을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너무나도 약해서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죽어버리고 또 다시 태어나야 하는 고통을 지닌 너희들이? 정말로, 정말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오랜시간 가슴속에 응어리진 말들이 토해져나왔다. 수없이 지켜보고 이제는 돌아볼 수 없을만큼 많은 시간을 지내며 내린 판단의 결과물들이 이제와서 다시 발버둥치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나약한 것들을 대신해 희생한 동포들을 아직도 기억하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동포를, 친구를, 선한 사람들을 부활시킬 거다.
잠이 들기전 늘 되뇌었던 말을 다시 한 번 입에 담는다. 별의 이치가 흐트러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소환했던 조디아크에게 동화되어 간섭당하고 영혼이 갉아먹히는 그 치열한 감각 속에서 끝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속삭였던 다짐이였다.
마지막 판정은 끝이 났다. 최후까지 몰렸던 불완정한 "영웅"은 이미 자신을 넘어 승리를 거머쥔 역사의 기록자가 되었다. 마지막 일격으로 허공으로 부서져 내리는 자신의 에테르를 보며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영웅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모든 빛을 몰아낸 최후의 반역자. 자신을 대신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반역자에게 에메트셀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짐을 그에게 선물했다.
"그렇다면 기억해라. 우리들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