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사칼리아(Passacagila)
W. 그랑프레스토
이미 아주 오래전에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마을의 어귀에 한 남자가 발을 들였다.
폐촌의 스산함에 어울리는 수수한 색채를 한 베스트와 바지, 그 위에 걸친 길고 검은 코트자락은 마치 무엇인가를 추모하는 것처럼 경건한 빛이었으나 핀턱이 들어간 드레스셔츠 위로 느슨하게 맨 붉은 크라바트는 무례하리만치 화사했다.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뇌우가 몰아칠 듯한 잿빛 하늘을 배경삼아 바람에 휘날리는 그것은 타는 듯 붉어, 무채색의 풍경 안에서 남자를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했다. 큼직한 낡은 손가방을 들고 있는 한쪽 어깨는 그 무게를 견뎌내느라 비스듬히 처져 있었으나 흙먼지가 흩날리는 폐촌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걸음은 마른 땅 위로 끌린 자국 하나 없이 단정했다. 셔츠 깃 위로 뽀얗게 드러난 목덜미 위로 부는 눅눅하게 차가운 바람 탓일지 약간 움츠린 상체가 앞으로 쏠려 있을 따름이었다.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마치 오래 살아 익숙한 마을 토박이의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오래된 약국, 색 바랜 레이스 커튼이 걸린 잡화점, 한때는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를 품었을 진열장이 흉하게 부서진 빵 가게, 구두 수선점, 여러 차례 가죽을 덧대어 고친 듯 좌판과 등받이가 얼룩덜룩한 안락의자 두 개가 나란히 낡아가고 있는 이발소를 지나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나간 집터들이 이어졌다. 바싹 말라붙은 덩굴식물의 줄기와 하얗게 색이 바랜 종이쪼가리가 붙어 있는 야트막한 담 너머로 입김이라도 닿으면 바스스 무너져 내릴 듯 삭아버린 세간의 흔적들이 깨진 묘비처럼 버려져 있었다. 초겨울의 색을 띤 세상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가벼운 걸음은 언덕의 끝에 자리한 예배당 앞에 멈추어 섰다. 누렇게 말라죽은 작물들이 드문드문 땅바닥에 붙어 있는 텃밭을 지나 다다른 문에는 먼지가 낀 거미줄이 엉키고, 붉게 슨 녹이 버슬버슬 떨어지는 망가진 자물쇠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거칠게 바람이 불 때마다 고장 난 경첩에 간신히 매달린 문짝이 삐걱삐걱 느린 비명을 질러댔다. 남자는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기만 없이 어둠으로 메워진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후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가, 어떤 것이 더 생겨나고 사라졌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궁금할 것도 없었다. 다만 이곳이 한적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던 시골 마을이었고, 언덕에 오르면 보드라운 들풀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와 아침과 밤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 남자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이제는 곧 사라질 폐허, 거듭하여 무너진 몇 번째인가의 세계에 불과했다. 완전히 흩어지는 과정에서 아직 남아있는 몇 생명마저 떨어뜨리게 되겠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것뿐. 이 세계에 속한 것들은 쇠락한 예배당의 모자이크 벽화에서 부스러져 나온 타일 조각들처럼 곧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릴 것이다. 종내에는 흔적도 없이 새로운 틀에 부어지게 될, 재활용되는 부속물로서.
회복되지 못할 만큼 상처 입힌 세계를 거두러 온 이는 마지막으로 남은 땅을 걸었다. 비바람에 쓸려 닳고 뭉그러진 회랑의 기둥을 손끝으로 무심히 쓸자 까만 가죽장갑 위로 뿌연 먼지가 물때처럼 밀려 엉겨 붙었다. 부서지고 썩어 내려앉은 긴 의자들. 찢겨 나가고 삭아버린, 원래는 선명한 색을 띠었을 휘장들. 끌려 내려져 흰 돌조각으로 변한 신의 형상과 바닥을 비집고 돋아난 잡초들과 그 사이를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 다니는 들쥐와 도마뱀. 깨어진 장식창의 유리가 융단 대신 구두 밑에서 자박자박 소리를 냈다.
본당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 도달한 탑 끝의 작은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는 공간 안에는 용케도 망가지지 않은 이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아 기분 나쁠 정도로 새하얗게 갈무리된 아마포 캔버스가 깨진 도자기 파편처럼 조각난 달빛을 받아 흐리게 빛을 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갈하게 펼쳐진 화폭 앞에서 남자가 들고 있던 손가방이 열렸다. 손잡이 부분의 칠이 낡아 벗겨졌으나 하나하나 길이 잘 든 붓들과 나이프, 깨끗하게 닦인 팔레트와 뚜껑 달린 작은 물감 병들이 차례로 잡혀 끌려 나왔다. 아마와 양귀비의 씨앗에서 짠 기름과 테레빈유, 붓을 헹궈낼 기름통, 천 조각, 유화제들과 보조제들, 석고와 아교를 섞은 도료와 거친 사포들까지 제 자리를 찾은 듯 작은 방을 메웠다.
더러워진 장갑을 벗어낸 남자가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듯 바닥에 떨어뜨렸다. 피비린내 나는 간계를 오래도록 다듬고 매만져 온 살인자의 손은 검은 가죽과 대비되듯 하얗고 고왔다. 손이 냉한 이들의 것처럼 흐린 라벤더 빛을 띤 손톱에서 이어지는 손가락은 봄날의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매끄러웠으나 아무런 흔적도 냄새도 배어 있지 않아 마치 조각된 무생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주인의 의지를 철저히 반영하는 힘 있는 손길은 어느 틈엔가 섬세한 화가의 것이 되어 팔레트 위로 물감을 덜어내며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민도 사색도, 스케치와 수정도 없이 곧바로 넓은 캔버스에 한 덩어리씩 올리는 손놀림을 따라 비어 있던 공간에 조금씩 빛과 그림자가, 형태와 윤곽이 자리 잡았다. 희고 매끄러운 석재로 이루어진 높은 건물들, 각지게 깎아낸 오팔처럼 무지갯빛으로 산란하는 창문과 테라스, 나부끼는 바람을 형상화한 듯한 외장이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솟아난다. 하나, 또 하나. 찬란한 지식과 다정함을 지닌 이들이 머무르고 모이던 공간이 그려지고 그 사이를 잇는 길목과 흐름을 모으는 광장이 포석과 함께 깔렸다. 무르익은 늦봄의 보랏빛 꽃잎을 흩날리는 가로수들이, 그 아래로 놓인 긴 의자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높은 하늘은 파랗고, 보드레한 구름은 엷은 진주빛을 띤 베일처럼 드리웠으며, 화단과 공원을 융단처럼 덮은 보드라운 잔디의 빛깔은 무르익은 봄의 녹색을 띠었다. 축복과도 같은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은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마구 덧발라지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겹치고 뒤섞이는 과정에도 탁해지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재현되었다. 진짜 화가가 보았다면 경탄보다는 부조리함과 공포마저 느꼈을, 그야말로 마법 같은 광경이 화폭에 도래하고 있었다.
“…….”
이변은 소리도 예고도 없이, 그러나 확연하게 탄생했다.
막 그려 넣은 건물의 그림자 사이에서 작은 실루엣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붓을 놀리던 손이 멈추어 서고 풍경을 빚어내던 옅은 금빛 홍채의 움직임이 한 자리에 멎는다. 멀고 높은 곳으로부터 굽어보는 시선에 아랑곳 않고 거품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자라나 어두운 곳에서 빠져나온 그것은 검은 로브자락을 부드러운 바람결에 나부끼며 어디론가 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손쓸 길 없으리만치 크게 잘못되어 버린 것 앞에서 탄식하듯, 치켜 든 손목을 허공에 고정한 채로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통제를 벗어나버린 그림 안 곳곳에 섬세하게 드리운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하나의 존재가 용납받자 둘과 셋은 쉬운 것이 되어 수없이 많은 거품들이 피어오른다. 깊은 물에 무거운 물체가 빠졌을 때처럼, 폭죽이 품은 화약에 막 열기가 번졌을 때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어느새 꽃그늘이 드리운 벤치에서 어른과 아이가 대화를 나누었고, 흰 석재를 다듬어 만든 계단 근처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광장의 구석에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의 그림자가 솟았다. 아코라의 탑을 거쳐 막 별의 중심에 다다른 방문자들을 향해 누군가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막 창조한 이데아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서 창조물 관리국을 향하는 연구자들의 걸음에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흰 반가면 아래로 활기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고 걷는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숱한 그림자가 그림 속에서 재생된다.
멈추어 선 붓 끝에서 멋대로 빠져나간 물감의 마지막 얼룩은 공원의 어귀에 작은 형체를 만들었다. 찬란한 도시가 약속한 미덕대로 그 뒷모습 역시 검은 로브자락을 드리운 것이었으나, 하필 마지막으로 묻힌 물감의 색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뭉클하리만치 그리운 푸른 빛 여운을 띠고 있었다. 바람이 흐르고 태양이 따스한 빛을 뿜는 도시를 약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는 거품으로부터는 반짝반짝, 보석을 갈아 뿌린 듯 빛의 잔영이 흘러내렸다. 어느 틈엔가 남자는 자신이 그려 낸 풍경 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정확히는 푸른 얼룩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터였다. 빛무리를 두른 그림자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게 드러난 공원의 입구 근처에 멈추어 섰다. 뚜렷하게 묘사되지 않아 흐린 녹색과 엷은 회색의 그림자로 번져 있는 그 곳은 과거 남자가 마음에 들어 하던 곳이었다. 위치가 절묘해서 가려지지 않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으면서도 사람의 발길이 쉬이 닿지 않아 느긋하게 낮잠을 청하기 좋았던, 특히 마음이 놓이던 장소. 그 근처에는 이미 다른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안 돼.”
그려 넣은 적 없으나 그리워하지 않았던 순간도 없었던 것들 앞에서 남자는 뒤늦게 초조해하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닿을 리 없는 만류를 등지고서 두 개의 그림자는 나란히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때로 잠든 척하던 어떤 이를 찾듯이, 로브의 후드 근처가 좌우를 둘러보듯 희미하게 흔들렸다. 손끝에서 피가 빠져나간 듯 싸느라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서 붓을 움켜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두 개의 그림자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뒤돌아선다. 평면의 캔버스 너머로, 눈가를 덮은 흰 가면 아래로 아득한 시간과 이어질 수 없는 거리, 허상과 현실의 벽마저 넘어 눈과 눈이 기어이 마주치고 만다. 넓은 소매 아래로 내뻗어진 손에 숨이 막혀 버릴 듯 깊고 농밀한 다정함과 사랑스러움을 머금고서. 화가가 그려 넣지 않은 작은 입술들이 마침내 두 개의 단어를 입가에 빚어 올렸다.
―에메트셀크.
―하데스.
남겨진 사명을, 죄를. 마땅히 되찾아야만 할 시간을 고작 이런 기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에메트셀크라 불린 남자는 지나치다시피 잘 알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간에 마모되고 짓눌리며 고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잃어가는 순간에조차도.
기어이 붓이 바닥에 떨어졌다. 부딪친 바닥에 깨어진 파편 같은 염료의 얼룩이 남았으나,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린 남자는 그 자리를 내려다볼 여유도 허락받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뻗은 손끝이 캔버스에 닿았다. 그러나 다정하게 맞잡아오는 온기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물컹하고 축축하게 미끄러지는 감촉이었다. 그 감각이 서러운 울음처럼 그의 이성을 붙들어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았다.
남자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끈적끈적하고 미끈거리는, 덜 마른 기름덩어리가 흰 손가락에 함뿍 묻어나 있었다. 물감이 문질러지며 뒤섞여 검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균형을 잃은 ‘재현’ 의 이데아도 평범한 그림으로 돌아갔다. 의도하지 않은 거품들, 망가진 그림 속의 올바르고 선량한 것들도 번져 흩어지며 저마다의 흔적을 남겼다. 개운하지 못한 잠의 여운에서 느껴질 법한, 무의식에 스며든 악몽의 조각들처럼 불규칙적인 얼룩이었다.
기름병의 내용물이 캔버스 위에 거칠게 흩뿌려졌다. 대량의 기름에 녹아 번지고 흘러내리는 물감이, 눈물처럼 엉겨 든 색의 덩어리들이 여전히 아름답게 남은 풍경들 위로 한밤의 비처럼 쏟아졌다. 새까맣게 뭉그러져 얼룩진 캔버스와 화구들을 내버려둔 채 그는 방을 떠났다. 한순간 분명 아름다웠던 색채들의 파편만이 매끈하게 정돈된 손톱 사이와 옅고 촘촘히 패인 지문 사이로 파고들어 한 점 얼룩을 남겨 두었을 따름이다.
기도의 목소리도, 그것을 들어줄 신도 떠나버린 공간을 등진 남자는 언덕의 끝으로 향한다. 무너진 울타리의 너머는 땅이 끊긴 하늘이었다. 검게 가라앉은 한 구석에서 천둥소리가 들릴 듯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 소용돌이치는 낭떠러지 너머, 그 까마득한 허공을 향해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띄웠다. 황폐한 세계, 언덕 아래가 어느새 모두 새까만 물로 뒤덮인 시리도록 고요한 적막의 세상 아래로 보랏빛을 띤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한 순간 일렁였다. 그는 위로, 홀로 버려진 육신은 아래로. 생명력이 끊어진 그릇이 꺾어 바치는 꽃처럼 떨어져 내렸다. 삶의 미련 같은 숨결 한 조각조차 토해내지 않은 몸이 수위를 높여가는 물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은 자리에, 희고 유려한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붉은 빛 크라바트만이 거칠게 번지는 물보라 위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