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오르골
W. 채유미리내
바다 밑바닥에 잠긴 오르골이 아무도 듣지 못할 연주를 계속하듯, 그 꿈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구름 한 조각 없는 푸른 하늘은 올려다볼 때마다 아득한 거리감을 주었다. 햇빛은 부드럽게 내리쬐고, 발 밑의 잔디가 밟히는 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났다. 검은 로브 자락이 잔물결처럼 일렁이면, 그 주름을 따라 그들의 말도 잠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곤 했다. 그리고 다시 눈 앞을 채우는 아득한 햇빛.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개개인의 대화보다는 하나가 되어가는 이해의 과정에 가깝다. 이 도시가 소통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토의가 아닌 토론이므로, 얘기를 끝내고 나면 상대방에게는 서로의 조각이 섞인다. 누군가를 겉모습으로 구분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므로, 그는 막연히 생각한다. 언젠가 나와 당신을 구분짓지 않고, 모두 우리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상대방이 없으면 토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는 안고 있던 책더미를 고쳐 쥐며 길 건너편을 바라본다. 누구나와 똑같은 긴 로브 자락과, 똑같지 않은 검붉은 가면, 바람줄기가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에메트셀크, 14명의 위대한 학자 중 한 사람. 응시하는 것만으로 죄가 될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는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무례해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던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여지없이 말갛게 푸르렀다.
그는 가끔 에메트셀크가 보는 세상을 상상한다. 명계와 비견되곤 하는 그의 세상은 자신과 얼마나 다를 것인지, 사라져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자취가 남은 세상은 어떨지, 과거에 손을 뻗고 싶다기보단 탐구심에 가깝다. 알고자 하는 마음은 언제나 모르는 일들을 향해 뻗어갔고, 위대한 학자들은 늘 그 마음의 종착지 너머에 있었다.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들의 세계는 아주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새롭게 알 수 있는 것들이 가득할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명계에 대해 생각한다. 밤마다 바라보는 별하늘에 유성처럼 흩날릴 혼들, 그들이 사랑했던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길 발자취에 관해서. 생각은 자연히 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로 흐르다가, 그들에게서 알 수 있을 새로운 아름다움에 가 닿았다. 한정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들, 자신은 아마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알 수 있을 테니 아직은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그에 관해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미덕이라지만, 그는 이 생소한 의문을 혼자 묻어두기로 했다. 아주 넓은 세계를 알아가는 것에 못지 않게, 아직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설렘도 꽤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의문을 품에 안듯 책더미를 고쳐 안는다.
토론관의 조명은 높고 은은하다. 이 조명을 주제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누군가 말한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 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빛은 머리로부터 멀고 우리는 서로의 말에 빠져들 테니, 의식은 현실과 멀어지고 위대한 개념만 남는 게 아니겠냐던 말.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든다. 새하얀 반가면이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어 의사를 표시하며, 상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응, 이번 의제 말이야,"
죽음에 관한 게 어떨까, 그 말을 꺼내는 자신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상대를 투명하게 비추는 눈동자라도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발 아래 감기는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함께 토론하던 상대는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다른 지인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고, 자신은 산책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거절했다. 길을 스치는 옷자락이 춤추듯이 흔들렸다. 토론관에서의 분위기가 아직 남았는지, 혹은 그저 그런 날이었는지 묘하게 붕 뜬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는 듯한⋯⋯,
아, 문득 저편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한다. 에메트셀크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는 잠시 생각한 결과 옆에 선 사람이 창조물 관리국장인 휘틀로다이우스라는 걸 기억해냈다. 두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종종 휘틀로다이우스가 낮게 웃으며 몸을 뒤로 빼곤 했다. 마치 그를 놀리고 자리를 피하는 것처럼, 흔하지만 그렇기에 이 곳에서는 낯선 모습이다. 그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거기에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별들 사이를 감싸는 안개마저 보일 듯한 맑은 하늘이었다. 이 별에서 저 별로, 꼬리를 끌며 흩어지는 불투명한 안개가 길을 잃은 혼처럼 보이는 하늘, 그는 그쯤에서 다시 에메트셀크를 본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지만, 별과 혼을 담은 그들의 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것임은 굳이 보지 않아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가끔 담소가 지나가는 지 옷자락이 스치듯 흔들리기를 반복한다. 그가 낮에도 느꼈던 평화의 내음이 그 곳에도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얘기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상대방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라 답했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알고 탐구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이해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기반으로 삼는다, 그런 즐거움을 접할 수 없게 되고 온갖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이야말로 죽음이 아니겠느냐, 는 말에 평소의 그는 동의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의 그는 햇빛을 많이 쬐어서 그랬는지, 혹은 보지도 못할 아름다움에 설레기라도 했는지, 조금 다른 답을 했다. 그 말에 상대방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건 너무 낭만적이지 않냐는 답을 했었지⋯⋯, 무슨 말을 했더라? 그는 자리에 멈춰 그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옆으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로브 자락이 스쳐 지나간다. 검은 로브 자락이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주름을 따라 그들의 말이 가까워졌다.
"⋯이번 재앙에 대한 학술적 견해는⋯"
"14인 위원회가⋯⋯"
재앙?
그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일순 고요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리고,
꿈은 심해로 이어진다.
⋯⋯생각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마치, 아주 오래된 레코드판을, 돌리듯이. 분명 기억하는 선율과는 다른, 잡음이 가득해 때로는 듣기조차 싫어지는, 그런 소음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을 버릴 수 없어 고집스레 틀고 있는 축음기처럼, 반짝이는 잔물결이 귓가를 스친다. 내리쬐던 햇빛과는 다른 눈이 아플 정도로 찬란한 빛, 이.
익숙할 만큼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로브 자락들 사이로,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화려한 옷차림이 보였다. 이 도시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할 화려함인데도 퇴색되어 보이는, 심해의 푸름을 그대로 덧입은 듯한 뒷모습, 그는 저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한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넘어 너무 무거운 것들을 지고 있는 듯한 등, 그는 무엇을 지고 있는가? 끊기는 생각은 그 다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분명 햇빛과 바람이 있었을 이 도시가 이상하게도 침잠해 있다는 생각도 한참 후에야 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했던 말에 대해 떠올린다. 죽음,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는 것, 온갖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 그리고 그 조그맣고 무거운 뒷모습...
'그렇지만⋯ 죽으면 더 이상 얘기할 수 없게 되잖아. 그렇다면 그건 온갖 사랑과 헤어지는 거겠지. 그동안의 다정과 안식을 모두 버리고, 일방적으로 떠나는 쪽이 되어버리는 것, 혹은... 그들로부터 오롯이 홀로 남겨지는 것.'
오롯이, 홀로 남겨지는 것. 홀로 연주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 바다에 가라앉은 오르골처럼⋯ 떠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던 사람이 떠나게 된 기분이 어떨지, '그'는 알 수 없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가라앉았고, 한참 전에 잊어버렸다. 그런 아름다움조차 잊은 지 오래다. 밤하늘에 박힌 별조차 일그러지고 쪼개진 것만 같고, 그 하늘 바다로 사라지는 혼의 색도, 헤어졌던 다정도, 그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알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에메트셀크를 생각하던 '그'의, ⋯ '나'의 꿈에 불과하므로.
심해가 진동한다. 에메트셀크는 고개를 들었다. 도시를 짓누르던 바닷물이 모두 빠져 나가고, 한 방울의 숨결이 바다를 감싼다. 짙은 물안개가 떠도는 도시는 기억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달랐던가? 중요하지 않다. 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