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장
W. 잉용
에메트셀크에게 현 인류란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이, 마찬가지로 갈라진 세계에서 기괴하게 꿈틀이는 것에 불과했다. 구원자라며 추앙받는 발밑의 ‘영웅’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되어 딱딱한 땅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쇄편에서는 구슬 같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다시는 하늘에 어둠이 설 수 없을 테지. 네놈의 영웅담도 이렇게 완결되겠군.”
보랏빛으로 비친 바닥을 붉게 흐리는 피를 보며, 에메트셀크는 읊조렸다.
모험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빛의 무녀와 새벽은 언제나 그 곁에 함께했다. 영웅들이 걷는, 걸어가야 할 여정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얽힌 가시나무 숲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패배는 세계의 패배와 마찬가지였기에, 긁히고 찢길 사실을 알면서도 끝없이 일어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손이라도 보태려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에 썩어버린 사람, 실제에서 눈을 돌려버린 사람, 백 년도 전에 빛에 휩쓸렸던 사람까지, 그들의 뼈마디 하나하나에 망령처럼 매달려 구원을 갈구했다. 그러니 더더욱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되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겼을 터였다.
라케티카 대삼림에서의 시련과 토벌을 거치면서는 그야말로 완전한 ‘어둠의 전사들’이 되었다. 현자와 조력자들이 모여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었고, 모험가의 힘이 더해진 결과 노르브란트를 밝게 비추던 대죄식자 중 절반 이상을 토벌했다. 어둠이 드리운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은 새카만 밤하늘에 환호했다. 남은 대죄식자는 둘 뿐이었다. 빛의 가호를 지닌 자라는 역할에 걸맞게 모든 빛을 받아들여 붙잡을 자신이 모험가에게는 있어 보였다. 야슈톨라는 대삼림에서 불길한 빛에 가려져 혼탁해진 모험가의 에테르를 몇 번이고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은 탓이었다. 더하자면, 모험가는 모두를 믿었다. 여행길을 걸어오며 몇 번이고 권모술수와 배신을 목격했고, 자신이 휘말린 적도 있어 무뎌지긴 했으나, 여전히 모험가는 사람을 믿으려 했다. 그중에서도 새벽은 특별했다. 서로 뒤돌아섰다는 명확한 증거를 직접 확인하고 납득하기 전까지는 맹목스러울 정도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모험가는 예고 없이 다가온 불행을 풀어낼 방법 정도야 이번에도 새벽이 금방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그래, 그런 사람이다. 분명 누군가는 미련하게 여길만한 행적을 걷는 사람이다.
동료들은 다음 목적지인 나바스아렝 폐허에 대비하러 나가, 성견의 방에 남은 사람은 셋뿐이었다. 넓은 방 안은 온통 푸른 조명만큼이나 시린 공기만이 감돌았다. 수정공과 모험가가 작은 소리로 아므 아랭의 대죄식자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에메트셀크는 예의 느릿한 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잠깐 걷자, 에메트셀크.”
모험가가 불러 세웠다. 수정공에게는 단둘이 대화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얘기해둔 상태였다. 그런 날이 온다면 꼭 알릴 테니 성견의 방에서 지켜봐달라고 부탁했었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대화의 방향과 사고를 위한 최소한의 대비책이었다. 모험가가 흘깃 바라보자 수정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메트셀크는 걸음을 뚝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시늉만 하며 비아냥거렸다.
“이런, 이런. 없던 관심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했나?”
“어차피 나갈 거였잖아.”
모험가가 무심하게 잘라 말하고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에메트셀크는 뒤돌아 선 수정공을 흘겨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뒤를 따랐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밖은 어두웠다. 크리스타리움을 벗어나 수정공 관문을 지날 때까지도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요새에 선 위병들의 말소리를 거쳐 마물의 움직임에 사부작거리는 낙엽 소리가, 그리고 박자라고는 하나도 맞지 않는 찰박임이 걸음마다 들려왔다. 그 소리가 거슬렸는지, 혹은 음성 하나 없는 순간을 견디기 귀찮았는지, 물안개가 짙게 낀 태초의 호수 초입쯤에서야 에메트셀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영웅님. 정말 산책이나 하자고 나를 데려온 건 아니겠지?”
“그냥 산책도 좋지.”
20분은 족히 되는 시간 동안 걷기만 했으면서 문제라도 있냐는 듯 대꾸하는 모험가가, 에메트셀크는 영 못마땅했다. 자기 주관이 이토록 불분명한 선구자라니, 현 인류가 존재 가능성조차 사절하는 야만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제자리에 선 채 참지 못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모험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결을 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어. 싫증이 나기 시작했거든…….”
모험가는 그 말에 우뚝 멈췄다. 여전히 시선과 발은 절반쯤 남은 호수 변 저 끝을 향한 채였다. 차갑고 습한 벽이 두 사람 사이를 두껍게 채웠다. 물과의 마찰음이 조금씩 멀어져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의미 있을법한 한 마디가 만들어졌다.
“너를 믿어보고 싶어.”
에메트셀크가 팔을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가는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합의된 아슬아슬한 평화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태초의 호수에 나란히 서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이 고요가 일순간 끝나버리기 전에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모험가가 돌아올 답을 상상하고 보낼 답을 생각할 때, 에메트셀크는 팔짱을 끼고 반쯤 몸을 틀어 모험가를 바라봤다.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만연했다.
“믿어준다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지. 정말로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나, 영웅님? 응?”
모험가가 어떤 생각으로 말을 꺼냈을지 에메트셀크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몇 걸음이 족히 되는 거리는 의도치 않게 생겨난 떨림을 분산하기에 충분했으며, 반대를 향했던 표정은 다시 볼 방도가 마땅찮았다. 그렇다고 직접 얼굴을 치켜들게 할 위인은 되지 못했으므로, 에메트셀크는 그저 자리를 지키며 늘 그랬듯 무익하게 끝날 대화를 기다렸다.
“정말 조금이나마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협력이라며 보이는 행동들에서…….”
맥락 없이 떠오른 생각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험가가 마지막 발음을 길게 늘어뜨렸다.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으나 에메트셀크는 구태여 재촉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맞잡은 손이 짓눌리도록 힘을 주거나 뿌리칠 수 있는 이는 에메트셀크뿐이었다. 조바심을 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물이나 찰박거리게 발을 휘저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모험가가 안달하며 조각난 사유물을 끌어 모아 다급하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어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는 거지?”
“협력 말인가? 이미 얘기했잖아. 당대의 영웅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쯤은 알아볼 가치가…”
“그런 가시적인 거 말고.”
모험가는 단박에 말을 끊어냈고, 그제야 뒤돌아서서 에메트셀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합의점을 운운한 주제에 지독하게도 적대감을 담은 눈빛이었다. 에메트셀크는 그 시선에 고개를 내둘렀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말해봐, 라는 듯한 태도에 모험가의 말은 단어 하나하나 힘이 실려 나갔다.
“원래의 세계를 그토록 갈망하는 이유 말이야. 네가 지금껏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봤는데, 마냥 거짓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거든.”
“오호라. 아씨엔을 이해해보겠다는 건가? 좋아! 태도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어.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가 어땠는지 알려주도록 하지.”
에메트셀크는 태초의 호수를 향해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을 허공에 문질렀다. 마디 끝이 맞닿았던 자리는 하나의 캔버스가 되어 에메트셀크가 더듬는 기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마디를 맞부딪혀 마찰음을 내었을 때, 보랏빛 정경은 오간 데 없고 회백색 건물만이 하늘 높이 빼곡하게 솟아 있었다.
“이제야 마저 걸어볼 생각이 드는군. 잘 봐 둬.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생소한 건축 양식과 웅대한 크기에, 모험가는 연신 감탄을 뱉으며 주변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가면과 로브로 온몸을 감싼 환영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뚫고 지나가고서야 인상을 잔뜩 구긴 에메트셀크를 돌아봤다.
“지나치게 두리번거리는 행동은 그만두는 게 어때. 이 모습들은 여기에 선 너와 나에게만 보이거든.”
당황스러워할 수정공을 생각한 모험가가 빠른 걸음으로 에메트셀크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둘은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고대 도시의 환상을 뒤집어쓴 호수 변은 여전히 습했다. 만들어진 건물들은 거뭇하게 어두워진 하늘 속에서 내리쬐는 달빛 대신, 제멋대로 비친 조명을 반사해 더욱 현실감이 떨어졌다. 어느 때보다도 느린 발걸음을 옮기며 모험가는 곁눈질로 풍경을 눈에 담고, 에메트셀크가 먼 곳의 환영을 다듬는 사이, 못해도 루가딘 평균 신장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 곁으로 몇 번이고 지나갔다.
“이 도시는 언제나 차분하면서도 활기로 가득했지. 완전한 우리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고, 모두를 위해 자신의 것을 공유했다.”
간단한 생활상부터 사회 구조까지, 에메트셀크의 문장은 모험가에게 친숙하거나 생소한 개념들이 섞인 모양새였다. 알라그의 박물함에 비치된 안내 시스템처럼 딱딱한 설명이었음에도, 모험가가 모르는 향수가 은은하게 스며 있었다. 긴 묘사가 끝나가고 같은 광경이 반복되나 싶을 때쯤, 에메트셀크가 걸음을 늦추며 벤치에 앉은 두 고대인을 가리켰다. 입은 보이지 않았으나, 작게 들썩이는 어깨와 몇 가지 손짓으로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간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상대적으로 작은 인영이 벤치로 다가섰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어린 고대인이었다. 곧 고대인들은 어린아이에게 선뜻 자리를 내주었으며, 뒤이어 세 환영은 무언가에 대한 좌담을 시작했다.
“자, 봐라. 지금껏 설명한 내용을 한 번에 이해하면 좋겠군.”
모험가는 홀린 듯 들리지 않는 대화에 집중했다. 발언 기회는 모두가 균등하게 차지했다. 누구 하나를 지나치게 나무라지 않았고, 견문 밖의 의견에는 긴 고민을 거친 후 다듬어진 생각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말로써 남을 이기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간혹 어린아이가 분별없이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깨닫게 될 테니 강요가 아닌 조언의 형태였다. 세 환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지 갸우뚱거리면서도 어딘가로 자리를 옮겼다. 모험가가 멀어지다 못해 사라져버린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하자, 에메트셀크가 다시금 손가락을 퉁기며 모든 환상을 꺼트렸다. 조금은 먼 거리에 젖은굽 나루가 보였다. 마르지 않는 해변의 끝자락이었다.
“인민변론관에 가거나, 더욱더 철저한 준비와 함께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겠지. 흔한 일이었다니까?”
모험가의 시선이 다시 에메트셀크에게 돌아왔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긴 간격을 두고 끔벅이는 두 눈과 함께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고요가 찾아왔다. 침묵의 시작은 항상 모험가로부터였다. 제 동료 앞에서는 농담도 쉬이 주고받고, 성견의 방에서 나오기 직전에도 아씨엔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져놓고서, 이제야 진중하게 의견을 다듬으려는 모양이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침묵은 언제든 다른 이유를 하나쯤 품고 있었기에, 에메트셀크는 그 침묵에 동조했다.
“그 세계로 돌아가려는 건 당연한 욕구라고… 네가 말했었지.”
마침내 모험가가 가까이 붙어 감상을 읊기 시작하면서, 에메트셀크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눈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왜 돌아가려고 하는지 알겠어. 좋은 세계였겠다.”
‘그럼, 물론이지.’와 같은 대답을 내놓으려던 찰나, 이어지는 모험가의 말은 에메트셀크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세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린 후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은 있어?”
모험가는 명백한 동정심이 담긴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런데도 에메트셀크가 무엇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을 전부 꺼내고야 말겠다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한 번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 곁에 돌아오더라도, 그리워하며 꿈에 그리던 모습 그대로는 아니잖아. 당연한 거야.”
모험가가 어떤 상실을 겪어왔는지 에메트셀크는 알 길이 없었으나, 자신이 잃어버린 도시와 사람과 평화에 견줄 바는 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이를 악물어 길게 갈았다. 바다 건너에서부터 도시를 침범해오는 불길한 안개를 떠올리다 보면 한편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평화로운 아모로트의 거리부터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들까지 집어삼킨, 빛처럼 뿌옇게 번져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증오스러웠다. 눈이 시리게 일렁이는 모험가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온 사람들이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종말과 너희의 노력을 모른 채로 살아갈까?”
“아는 척 지껄이지 마라.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래서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곧 인내심을 쥐어뜯길 것만 같았다. 모험가는 여전히 다음 문장을 어떤 단어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씨엔을 더욱 동요시킬 방법을 찾는 악독한 호기심을 내비쳤다. 지금껏 지켜본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 턱을 문질러대는 모양은 에메트셀크가 신인류에게 느끼는 혐오감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네 동료들이 이 추악한 꼴을 봐야 하는데. 아, 한 명은 이미 지켜보고 있지 않나?”
모험가가 눈을 크게 뜨며 움찔거린 순간, 에메트셀크는 암흑뿐인 에테르를 날카롭게 벼려 던졌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잠시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을 뿐, 너무나도 쉽게 고통을 흘려보낸 모험가는 에메트셀크를 비웃으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마주한 눈동자 사이로 서로를 향한 경멸이 오갔다.
“이러기야? 결국은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나 본데. 그렇다면 질질 끌지 않을게.”
연이어, 모험가가 긴 고민을 끝내고 짙은 적의를 담담하게 밀어 넣어 짓이기듯 말했다.
“네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을 가른 에메트셀크의 손짓에 모험가의 몸이 수없이 꿰뚫렸고, 둔탁한 파음과 함께 모험가는 맥없이 거꾸러졌다. 얕은 물이 쉼 없이 모험가의 귓가를 쓸었다.
“어쭙잖은 이해는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완전한 우리와 불완전한 너희를 한 저울에 올리려고? 너 따위가 뭐라고 감히!”
“네 눈에는 하찮은 조각 정도로만 보이겠지. 실제로는 뭐라도 이뤄보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건데 말이야…….”
조금만 더 호수에 가까웠다면 물을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상체라도 일으켰겠지만, 모험가는 여전히 누운 채로 찰랑거리는 물소리 사이에서 대답했다. 따끔거리는 감각 탓에 간혹 깊은 숨을 들이쉬더라도, 조금이나마 속을 할퀼법한 말을 계속했다. 에메트셀크가 그런 모험가를 구두 굽으로 꾹 짓눌렀다. 잠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옅게 흩어져갔다. 압력이 더해질수록 모험가가 느끼는 통증 또한 심해졌다.
“윽…”
“이것도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몸부림인가? 경박하게 굴지 마, 영웅님. 마지막 문장을 후회로 장식하고 싶지는 않잖아. ……응?”
마지막 음절과 동시에 강한 힘이 실리자 모험가가 급하게 팔을 들어 에메트셀크의 발목을 붙잡았다. 주기도 세기도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보겠다고 악쥔 손이 쉴 새 없이 떨리는 모습에 에메트셀크가 코웃음을 쳤다.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 모욕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수정공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것 같나? 현자들을 모아다 나와 대적하게 만들고, 그 사이에 수정공이 너를 구할 거라 생각해?”
모험가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어서 우악스럽게 멱살을 잡아끄는 손길에 모험가가 힘없이 딸려 올라왔다. 서로의 얼굴이 맞부딪기 직전에서야 멈춘 에메트셀크가 눈을 치켜떠 모험가를 노려보았고, 노르무레한 두 눈동자만이 모험가의 흐릿한 시야를 메웠다.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거야.”
한껏 낮춰져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모험가 주변을 맴돌았다. 조금이라도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물린 피가 입술과 턱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뭐라고 대꾸라도 할 생각이 들었나 봐? 그렇다면 잘 해. 정말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거든.”
그 말에 모험가가 실없이 웃었다. 얼굴에 피가 몇 방울 튀었으나, 에메트셀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자기 변론 기회를 주고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생각이 짧았다고 고백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무례를 없던 일로 취급해줄 수 있었다. 다소 유치하긴 하더라도 양측 모두에게 어떠한 손실도 없는 이 방향이 영웅들에게는 최선책으로 다가가리라고, 에메트셀크는 생각했다. 그러나 모험가가 남기기로 한 말은 기대와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우리는… 우리는 모두 상실을 겪으면서 살아가. 그렇지만 이 사실 하나는 명심해 둬. 우리의 본질은 고작 이런 상실 따위에…”
첫 단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을 뿐, 결국 모험가의 뜻은 굽혀지지 않았다. 에메트셀크가 잡은 손을 쥐어틀자 모든 숨결이 의미 없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었다. 기도가 서서히 조여지고, 고개는 뒤로 넘어가며 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분명 끊임없이 기회를 줬다. 그런데 어쩌나, 그 기회들도 끝나버렸네. 후회라도 남기지 그랬어.”
발버둥 치는 모험가의 귀에 속삭이자 마지막 숨을 쥐어 짜내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완성된 문장을 남겨보겠다는 모험가의 노력이었다.
“굴복하거나.”
에메트셀크가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런데도 말하려는 의지를 상쇄하기에는 모자랐는지, 모험가는 기어코 문장을 끝맺었다.
“사라지지 않거든.”
차라리 그랬더라면, 소망을 담은 상상은 귀가 째질 듯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흩어졌다. 어떤 모독을 감내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를 때 죽이는 편이 훨씬 편했을 거라 생각했다. 모험가가 쌓아온 신뢰는 에메트셀크를 몇 번이나 건드렸고, 그때마다 에메트셀크는 위태롭게 휘청였다. 내부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많이 지쳐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미래에 대한 의심은 가능한 한 접어두었다. 오로지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이 계속될 날을 기다리며, 매 순간 넘어질 듯하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데에는 성공했다. 마지막 한 고비도 비교적 쉽게 풀어낼 수 있었다.
종말환상의 끝에 선 에메트셀크가 느릿하게 눈을 뜨고 두어 번 깜박였다. 결국 신인류의 대표 격인 영웅들은 메가테리온을 넘어서지 못했다. 손가락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에 잔혹한 야수는 사라지고 엉망으로 쓰러진 영웅들이 드러났다. 결판을 낼 차례였다.
“…에메트셀크!”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원초 세계의 모험가가 상처와 빛으로 가득한 몸을 겨우 일으켜 외쳤다. 에메트셀크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처절한 모양의 모험가를 맞았다.
“네 놈의 그 끈질김은 박수를 받을 만해. 아,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쳐줄 생각은 없어. 우린 어디까지나 적이잖아? 그런 건 네 뒤에 누워있는 녀석들에게 부탁하라고.”
동시에 고개를 까닥이며 곁눈질하자, 모험가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달려가는 대신 에메트셀크를 공격해왔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두 눈동자에서는 분노가 비쳐 보였다. 문득 모험가의 분노가 자신과 같은 유형일지 호기심이 돌았으나, 이미 신뢰와 협력 관계는 끝난 지 오래였다. 가벼운 손짓으로 공격을 막은 에메트셀크는 검은 화살로 모험가를 밀어내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남은 희망을 어떻게든 찾아보겠다는 얼굴이군 그래……. 희망이라면 조금 있지. 네 동료는 살아나갈 수도 있다는 정도로 끝이지만. 아, 누군가 네 장례를 치러주긴 하겠네. 우리에게는 이렇게 용감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하고 말이야.”
모험가는 불균일하게 굽이쳐 상처 틈을 비집어내는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허무하게 죄식자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붙잡는 일에 비하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울렁이는 빛덩이를 먼 곳으로 뱉어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옮겼고, 에메트셀크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끈질기단 말이야. 왜 자꾸만 일어서서 금방 끝날 일을 번거롭게 해.”
단 다섯 걸음을 남기고 중심을 잃어 무릎을 꿇고 만 모험가가 고개를 꺾어 에메트셀크를 올려다봤다. 눈물과 빛과 상처가 뒤섞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얼굴 아래로 처절함이 돋아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갈라지듯 터져 나왔다.
“네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영원히 건재하기를 바라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였어…….”
“아하,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건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알기 쉽게 말해줘야겠군. 이 세계도, 너도, 전부 끝이야. 참,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겠어. 지금까지의 손실은 시행착오로 기억해두자고.”
에메트셀크가 에테르를 빚어 긴 창을 만들어냈다. 비록 허무할지라도, 영웅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적당한, 이리저리 비틀리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럼, 잘 가라.”
고동을 멈춘 모험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저들이 아무리 잡초처럼 자라나고,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해도 실제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미한 점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작은 의심 탓에 자꾸만 갈라진 세계의 영웅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에메트셀크는 과거를 향한 강한 집착이 희망을 가린다는 사실을, 되돌려 받겠다는 의지는 미래를 개척하고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차원 붕괴와 통합이 거듭될수록 득달같이 달려들 불완전한 인류가 내심 두려웠다. 그러나 에메트셀크는 좁혀지는 전력 차이가 걱정될 뿐이라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윤회자를 찾고, 새로운 씨앗들을 인류 사이에 촘촘히 심어놓으면 될 일이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혼을 가진 새로운 영웅과 마주쳤을 때를 기약하며, 검은 물결을 열어 세계의 틈 사이로 사라졌다.
영웅들이 흘린 노력의 결과로, 세계는 완전한 빛을 되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