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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의 고독

W. 애노스

‘아아, 조디아크시여. 언제까지 이 짓을 버텨야 합니까.’

 

에메트셀크-솔 조스 갈부스 황제는 생각했다.

화려한 연회장, 눈 부신 불빛, 고풍스럽지만 흥겨운 음악, 연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춤사위. 이 무엇 하나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다. 황제 즉위식 축하연은 주인공인 갈레말 제국 초대 황제인 솔 황제를 제외하고 모두가 흥과 술에 취해 있다. 잔데로 있었던 알라그 제국은 나름대로 볼거리라도 있었지만, 기술도, 유흥도 한참 뒤떨어진 갈레말 제국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그에겐 시간 낭비일 뿐이다. 술이 차라리 독하면 모를까. 축하연에서 내오는 술은 열 궤짝을 -사실 꽤 높은 도수의 술이다.- 전부 마셔도 취하기보다는 배불러서 마시지 못할 술뿐이다.

‘하찮고 불완전한 것의 몸을 취할 때 귀찮지 않도록 독에 강한 몸으로 개조를 시켰더니 술로 넘길 수 있는 미미한 시간마저 무료하게 될 줄은 상상이나 했겠나-.’

라 생각하며 원래 입는 갑옷이 아닌 거추장스럽고 실용성은 없는 화려한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고 -사실 입고 있는 제복은 꽤 간소화했다.- 연회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솔 황제는 황비와 함께 자신이 다스릴 제국의 관료들에게 허례허식만 가득한 안부 인사를 했다. 인사하는 것도 한두 시간 정도 하니 목은 쉴 대로 쉴 것 같고 불편한 구두와 제복은 안 그래도 답답한 숨이 다 막힐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사를 겨우 끝마치자 연회의 하이라이트 궁중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무도회는 화려했다. 갈레말 전통춤부터 왈츠까지, 다양한 춤과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우러지며 춤추는 모습은 사치스러웠지만 그야말로 “제국”의 위엄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질려버린 한 사람. 솔 황제는 취하지도 못하는 몸으로 자연스럽게 술과 여흥에 올라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가는 연기를 보였다. 그렇게 붉은 와인 한 잔만 들고 바깥공기를 맡을 수 있는 테라스 난간에 솔 황제-에메트셀크는 걸터앉았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은 추억 속의 따듯한 바람과는 달랐지만, 추위가 어떻게 그를 괴롭힐까, 내리쬐는 달빛에 에메트셀크는 천천히 밀물이 밀려오듯 추억을 상기했다.

선선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로브 자락들이 있는 ‘아모로트’, 그 거리를.

*

 

 

흰색의 가면들과 검은 로브들이 어울려져 지식을 논하던 그곳. 찬란한 햇빛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비추던 그곳. 꿈에도 잊지 못할 그곳. 오직 그곳만이 진정한 인간의 고향. 그리고 그 속에서 눈에 띄는……. 영롱하고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에테르 빛의 그 사람….

에메트셀크는 그 사람을 생각하자 퍼뜩 정신이 들면서 취하지도 않았던 술에 취했다 깬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오랜 시간 그리워하여 미쳐가는구나. 라하브레아, 그분처럼 나 또한 추억에 미치는구나.’

라 생각했다. 이제 단 3명, 아니 이제 2명만 남은 진정한 인간의 꼴이 말이 아니게 돼버렸다며 속으로 한탄하다 아직 무도회가 한참인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시작은 황제와 황비의 춤으로 시작하여 분위기가 열이 올라 참석한 모든 이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전히 솔 황제는 테라스에 나와 숨을 고르며 오래된 추억을 꺼내는 그는 마치 컬러 영화 속 흑백사진과 같았다. 한 번 생각이 옛 추억에 미치자 기억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기억의 흐름을 그저 천천히 흘러가듯 유영할 뿐인 에메트셀크였다.

 

친구라 불렀던 그 사람과, 휘틀로다이우스와 함께 걸었던 그 거리를 기억한다. 그 거리에서 어쩌다 말이 나온 주제로 토론장까지 가서 깊이 있는 토론을 했을 때 며칠 밤낮 가리지 않고 토론했다. 그러다 대회의장까지 넘어간 적 있었던 토론은 종래에는 토론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답지 않은 피곤함에 절여져서 회의장을 나가야 했을 정도로 굉장히 즐겁게 토론을 했었다.

애나이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틀어놓았던 부드러운 재즈풍의 음악은 아직도 서류 작업을 하다 보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여러 학술원을 오가며 복도 여기저기와 어쩌면 창조마법으로 이데아를 가져다가 만든 휴대용 오케스트리온에서도 유행이었는지 들렸던 비슷한 부류의 음악들. 밝고 쾌활한, 오직 찬란한 미래만이 존재할 것 같은 아모로트에게 어울리는 노래들이었다.

14인 위원회, 에메트셀크라는 자리에 임관되기 전, 아모로트 바깥세상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많던 아모로트와는 다른 풍경들, 새롭게 발견한 식물과 동물들. 완전한 인간이 보기엔 불완전했지만 무심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저 무도회장에 비치는 수많은 사람의 웃는 얼굴들도…

 

“….아름답다고?”

 

방금 자신이 생각한 것에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것을 보고, 하물며 14개의 조각 중 8개밖에 모이지 못한, 그런 되다 만 것을 ‘아름답다’? 정말로 그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레몬빛 눈을 혼란과 분노가 섞여 어둡게 침잠시켰다. 아름답던 도시, 아모로트가 파괴되고 무너지던, 별의 섭리가 파괴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창조마법이 날뛰어 사람들의 공포가 야수로 변하던 그 날을 기억한다. 그 끔찍한 순간과 종말의 그 날을 기억했다. 종말의 날에 희생되었던 동포를 기억하며 별의 질서인 조디아크를 소환했다. 그리고 하이델린의 일격에… 원류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세계가 14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것을 기억한다. 그 쪼개짐에 한때 친우였던 그 사람의 에테르 또한 쪼개지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봤던 그때를 기억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지옥 같던 순간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자 원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가지고 있는 마력도 극히 적은, 생물이라 이름 붙여야 하나 의심스러운 것들이 바닥을 기고 걸어 다니는 것을 끔찍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그때를 기억한다.

 

*

 

 

“..폐하? 거기 계십니까?”

 

황비와 친위 대장이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는 솔 황제를 염려하여 연회장 안의 커튼으로 가려진 테라스 너머로 황제의 안위를 살폈다.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에메트셀크는 솔 황제로 연기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 내가 너무 오래 있던 것 같군”

 

와인잔에 비친 두 그림자가 비치며 반짝인다. 분노로 침잠되었던 레몬빛 눈동자는 진중한 황제의 눈으로 돌아왔다. 

 

“페하, 아까부터 독한 술을 마실 때 많이 마시는 가 싶어서 걱정했습니다. 별 일 없으신거지요?”

 

황비가 제법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며 솔 황제의 팔에 팔을 감싸 안는다. 솔 황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는 레몬빛 눈에는 투명한 벌꿀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듯한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불완전한 것을 향한 증오와 분노는 넣어두고 웃는 낯을 보이며 황비와 함께 솔 황제는 사람들 틈 사이로 들어가 인사를 나눈다. 

 

가장 오래된 배우가 다시 한 번 연기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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